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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책 [죽음의 에티켓]

 

죽고 싶다는 말이 안 나오는 날이 없다.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옆에서 누군가 '죽겠다'라고 말해줄 정도이다. 죽으면 지금의 힘든 고통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기대감은 공감이 된다.

 

죽음은 이렇게 주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반면, 정작 죽음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정확한 자료를 정리한 것은 얼마나 될까?

저자 로란드 슐츠는 뭔핸 대학의 의과대학 도서관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2층까지 쌓여있는 어마어마한 책 중에서 단 한 권의 책만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책은 무려 1,400 페이지 짜리 어마어마한 분량이었지만, 정작 죽음의 과정을 다룬 내용은 단 9페이지 분량일뿐...

 

이런 상황에서 과연 나는 죽음을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 생각의 이유 ]

자신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인간이라면 기본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한다.

책의 시작 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죽음을 회피하기 위해 생각한다는 내용이다.

 

인간은 평생 자신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부인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바로 그 이유로 생각하는 존재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 죽음을 부인하기 위한 생각을 이제 죽음으로 돌려볼 차례이다.

 

힘들어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더워 죽겠다, 추워 죽겠다... 일상적으로 하는 말 중에서 죽음이 들어가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뉴스에서 자연재해, 사건, 사고 등으로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을 종종 들을 수 있다. 이제 죽음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보자.

 

죽음이라고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이거지...

 

 


 

[ 무슨 말을 하면 좋을까? ]

우선 감정부터 조절

 

주변에 내가 아는 누군가가 죽어간다고 하면, 어떤 말을 하는 것이 좋을까?

'빠른 쾌차를 바랍니다' 정도의 인사면 적절한 편일까? 어쩌면, 온갖 감정이 교차하여 너무나 많은 생각에 침묵할지도 모른다.

 

침대에 누워 점점 죽어가는 사람이 나와 친할수록 안타까움이, 그 사람이 아프면 아플수록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나는 보험을 잘 설계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등등.. 죽음의 에티켓의 시작은 우선 이런 감정에서 시작한다.

 

어떤 감정이 내 안의 진실에서 생겨난 것인지, 어떤 감정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생겨난 것인지 따로 분리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중에 이런데만 가지말자... 출처 : 영화 곤지암

 

단순히 감기에 걸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닌,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사람을 걱정하여 병문안을 간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다양한 반응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는 너무나 서럽게 울고 있는 반면, 꼭 그만큼 차분한 사람도 있다. 과거를 따지고 원인을 분석하기도 하고, 반대로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하기도 한다. 또한 침대 옆이 사람으로 붐비는 곳도 있고, 반대로 한가한 곳도 있었다.

 

그럴 때 마다 다양한 감정들의 표출에 영향을 받았고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지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고민에 빠졌다.

이런 경우 어떤 게 내 감정인지 잘 구분만 한다면 타인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

(만약 이 책을 읽었었다면 그때 내 마인드를 정리하는데 도움이 됐을 텐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다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들 중 환자를 배려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주의한다.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 중에는 이런 순간에 건강한 사람들이 자신 위에 올라앉아 재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역지사지로 생각해보자...

 

당연한 말 같은데... 이런 경우가 실제로 종종 있다.

예를 들면, 마인드 컨트롤이나, 기도문이 당신을 치유해준다는 말, 듣도 보도 못한 민간요법이나 검증되지 않은 방법의 강요, 암세포는 마음가짐으로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 등.. 혹시 병문안 갈 일이 있다면 이런 말을 주의해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음을 볼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서툴기 때문이다.

 

 


 

[ 나의 소원 ]

소원을 이루기 위해 준비할 것들.

 

만일 내가 다음 주에 갑자기 죽게 된다고 하면 무엇을 하면 좋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유서일 것이다. 

"내가 죽으면 어디 어디에 묻어주고, 내 재산을 사랑하는 부모님께 전달해드리며~" (라고 해도 국세청에서 상속세 20% 때고 지급되겠지...)

 

미리 미리 대비해놓자. 

 

하지만 이런 경우에 써야 하는 문서가 유언장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3개의 문서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환자처분서, 사후 방식, 유언장'이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건지, 아님 번역하면서 우리나라 양식과 달라진 것인지 검색해보아도 나오진 않았다.

여하튼, 중요한 점은 이런 문서들에 대해 고민을 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에티켓 두 번째는 바로 올바른 서류작성이다. 단순히 유서를 예쁘게 쓴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반드시 서명을 해야지 나의 마지막 소원에 구속력을 보장받을 수 있다.

 

당신이 익명의 무덤에 묻히고 싶다면 성직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서면으로 적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서명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당신의 소원에 구속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환자처분서나 사후 방식이라는 말은 좀 생소하다.

내용을 보면 대충 이런 식이다.

 

가능하면 오래 살고 싶나요? 아님 삶이 질이 더 중요한가요? 지금까지 사별한 사람들의 죽음을 어떻게 대하셨나요? 그때 무엇이 도움이 되셨나요? 다른 이의 도움을 받을 수 있나요? 아님 다른 사람한테 부담이 될까 봐 두려우신가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적어 보십시오. 그 대답들을 당신의 환자처분서에 붙여두세요.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계획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이는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꼼꼼하게 준비할수록, 더 완벽하고 더 매너 있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

 

인생의 계획을 짤 때 범위를 내 사후까지 넓힐 필요가 있다.

'죽음이 다가올 때 남태평양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작고 아름다운 오두막집에서 아름다운 자연을 만끽하며 차분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다.' 이런 식으로..

 

 

제대로 계획하지 않으면 내 비석에 엉뚱한 내용이 적힐 수 있다.

 


 

[ 고통과 절망 속에서 ]

생명과 죽음이 점점 벌어질 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삶보다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 죽음은 재촉하진 않지만 일정한 속도로 멈추지 않는 등가속운동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 순간 사람들은 진실되고 솔직해지기 시작한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죽기 직전에 비밀을 털어놓거나, 용서를 구하거나, 참회하는 장면들이 생각한다. "용서할게, 미안했어, 사랑해, 고마워, 사실은 숨겨왔던 비밀이...." 이런 식의 대사를 한다.

 

아주 아름답고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생각은 오로지 건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상상이라고 한다. 그들은 엄청난 통증으로 괴롭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과 죽어가는 사람의 사고가 점점 달라지기 시작한다.

죽음에 점점 다가가는 사람은 육체적 고통과 엄습하는 사회적 절망에 엄청난 고통을 받는다.

그런 분들한테는 앞으로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지, 죽음 다음에 어떻게 될지가 가장 큰 고민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아름다운 화해와 참회의 말은 그야말로 덧없는 것일 뿐...

 

화해할 일이 있으면 미루지 말고 미리미리 하자.

 

그러면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한테는 무엇이 중요할까?

바로, 불안한 가운데 안정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한다.  즉, 세 번째 죽음의 에티켓은 바로 일종의 배려이다.

 

한 예로 어느 병원의 수술실이건 사용하는 수건은 전부 초록색을 사용한다. 초록색은 빨간색의 보색인데, 두 색이 섞이면 검은색이 된다. 그래서 피가 묻었을 때 단순히 얼룩으로 보이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이는, 관리를 조금만 잘 못해도 엄청난 피가 날 수 있는 사람을 배려하기 위함이다. 반면 흰색을 사용하면 빨간 피를 보고 흥분하거나 불안한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전 세대에 비해 죽음을 볼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어쩌면 살면서 단 한 번도 죽음을 직접 볼 기회가 없을지 모른다.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두렵게 느끼는 것이다.

아마, 최후의 순간이 다가올 때 나는 엄청난 불안에 무기력하게 굴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지식으로 무장하여 그 불안감과 맞설 수 있어야 한다.

 

 


 

[ 죽음의 순간 ]

그리고 최후의 순간

 

이제 시간이 더 흘러 정말 임종이 눈 앞에 임박했다. 여기서 유명한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저 질문에 대한 답은 '모른다'이다. 독버섯 먹었다고 죽는게 이니다!

 

현대 의학은 과거에 난공불락이라고 여겼던 질병을 하나하나 정복해왔다. 심지어 멈추었던 심장을 다시 살려낼 수 있고, 멈춘 장기를 다른 장기로 교체할 수도 있다. 항생제 발견으로 흑사병과 천연두 등 각종 질병을 몰아내었다. 심지어, DNA와 유전자 검사 기술로 미래의 질병도 예측할 수 있다. 현대 의술은 죽음의 문턱을 넘은 사람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수준이다.

 

단순히 심장이 뛰지 않고, 마지막 숨을 내뱉었었다고 해서 죽었다고 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죽는 시점을 명확히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죽음은 아직도 미스테리 한 영역인 것이다.

 

죽음의 특징 중 하나는 죽음이 딱 어느 순간에 시작되었는지 그 정확한 시점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장 박동이 없는 인간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죽긴 죽었는데, 아주 죽은 것은 아닌 걸까요? 확실한 건 죽음이라는 것은 죽어가는 중간에 언제나 눌리면서 켜지고 꺼지는, 버튼 같은 것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종교적으로 그리고 의학적으로 죽음에 대한 반응은 다르다.

종교에서는 영혼에 대한 예식이나 예법이 있다. 기독교인은 시므온의 노래를 부르고, 무슬림은 종교 고백을 낭송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영혼을 배려하여 어느 정도 시간 동안 시신을 건드리지 않는다. 반면, 의학에서는 영혼의 존재가 없으며 이런 행위들은 상상일 뿐이다. 하지만 두 가지 관점에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한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다.

 

죽음의 에티켓 네 번째는 바로 체험이다. 기회가 된다면 당황하지 말고 죽음을 느껴보라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지옥같은 곳을 다녀오신 분도 있었지... 사진은 빅터 프랭클 심리학 박사.

 

하지만 근본적으로 양측이 공통으로 주장하는 게 있습니다. 
누구든, 한 사람의 죽음 옆에 있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온 마음을 다해서 그 신비함을 맛보라는 것입니다.
죽음은 명확한 파악이 불가능한 영역에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초자연적인 현상이 일어났다는 내용을 종종 본 적이 있다. (출처 : 서프라이즈...) 다른 영혼이 빙의했다던가, 내 영혼이 일어나 나를 본다던가 등등 섬뜩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무서운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규정할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 과정은 신비로운 무언가가 있다고 한다. 죽음을 회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느껴볼 수 있는 작은 용기를 가지라고 저자는 권한다.

 

 

 


 

[ 1장 마무리 ]

죽음의 에티켓 1~4

 

뭔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많이 써보니 느낌이 오싹해지는 감이 있다. 첫 장에서는 우리가 죽음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 내용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죽는 것도 일이 되었다. 

이번 에티켓을 기억하여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배려하고, 나의 최후의 순간을 어떻게 맞이할지 고민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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