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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8년 평민당 입당, 91년 탈당과 복당, 2003년에 열린 우리당 창당을 '세 번의 강렬한 원체험'으로 꼽았는데 
2. 차라리 중간평가를 포기하고 지방자치제를 얻어내자 우리당은 지역에 하부조직이 없다. 근간이 없다. 지역 조직들을 만들어 가자. 
3. 내가 의총에서 발언을 하게 됐어요. 중간평가 대신 지방자치를 받자는. 그리고 DJ가 청와대에서 가서 91년에 지방자치제 선거를 하기로 약속받은 거예요. 
4. 나중에 거절한 이유를 들었지. 87년 대선에서 내가 패배한 것을 크게 반성한다. 그렇다고 쿠데타 세력하고 함께 할 수 없다. 
5. 선거도 참패로 끝나고, 야권통합도 안 되지, 집권 전망은 없어 보이지, 정치 관두고 출판사나 하는 게 낫겠다 싶었어요. 2주 정도 돌아다니다 오니까 신민당이 꼬마 민주당과 통합하기로 했다는 거야. 
6. 실제로 노무현 의원인 통합파의 중심이 돼서 DJ와 담판을 지었어요. 이해찬을 복당시켜주지 않으면 나도 나가겠다고.
7. 내 탈당의 순수성을 이해하셨기 때문일 거예요. 정치가 야바위판 같지만 나름의 룰이 있어요. 입장이 달라도 모함으로 비난하지 않는 게 중요해.
8. 선거 비용을 마련하는데도 애를 먹었어. 그때 처음으로 국고지원이 됐어요. 당직자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서울에 5억 배정을 할 거 같다고. 펄쩍 뛰었지. 
9. 우선은 완전히 새로운 선거운동을 해야 한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봤어요. 가능한 젊은 사람들로 구성했어. 김민석, 이광재, 김희완, 정미홍, 차영 이런 사람들.
10. 전략회의를 여러 번 하면서 미디어 선거를 목표로 잡았어요. 95년에는 했거든. 유세만으로는 안돼. TV 토론을 가능한 많이 해야 하는 거예요. 
11. TV 토론을 보고 DJ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92년에 나도 TV 토론을 할 수 있었더라면 떨어지지 않았을 텐데... 직접 해명할 기회가 없었잖아요. 
12. 후보 이미지. FGI(표적집단 면적)에서 '서울 포청천'이 나왔어요. 당시에 '판관 포청천'이라는 드라마가 유했었어요.
13. 젊고 활기찬 느낌을 주려고 포스터 사진도 노타이 차림으로 찍었어요. 선거에서 처음으로 양복을 안 입은 후보 포스터였을 거야. 촬영도 야외에서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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